✒ 이두온 📔 오전 열시 이십분은 수작을 부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 3 - 국한되어 사용되는 사랑은 너무 과대평가되었고, 지리멸렬하고 추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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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회는 이십오년을 그 바닥에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신랑이나 신부를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자신을 모략하는 말을 들은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허인회는 그 결혼식을 망쳤다. 염보라의 연락이,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다만 신부와 신랑이 내내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던가. 서로를 기만하면서 그렇게 꼭 잡고 있지 않았나. 그들은 결혼할 자격이 없었다. 사랑이 그런 것일 리 없다.
지민은 요즘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찰랑대는 풀장 같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제어가 되지 않았다.
✒ 김애란 📔 자정 넘어 아내가 도배를 하자 했다. - 5 - 평범한 삶과 평범한 죽음과 평범한 이별이 조금 더 세밀하게 적혀있는 책. 가끔 인터넷 뉴스의 타이틀로 요약된 비극을 본다. 그 비극 하나하나를 담담하고 소상히 작성해 놓았다. -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의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마지막 단편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답을 찾은 것 같다.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들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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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그날 내가 두 돌도 안 된 영우한테 장난으로 “영우야, 오늘 엄마 생일인데 뭐해줄 거야?” 하고 물었어. 그랬더니 영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 말도 못하던 애가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막 손뼉을 치더라고. 영우가 나한테 박수 쳐줬어. 태어났다고……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말이 좋아 소집이지 수집이고 징집이며 사냥이라고까지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혈기 좋게 항의하던 이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무거운 침묵 속에 잠긴 노인이 됐다. 마지막 화자가 됐다.
곽교수는 ‘단계’ 없이 대화하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직관적이고 나쁘게 보면 제멋대로인.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 정유정 📔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 2 - 방대한 양 내내 숨막히는 스릴러가 펼쳐진다. 피해자는 여성들과 아들인데, 오히려 가해자에게 연민이 가득하다. 최현수가 끝까지 아내에 대한 죄의식이 부족한 것만 봐도 그렇다. 남자는 남자만 사랑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 피해자 중 하나인 최서원에게도 동점심이 사라지는 까닭이다. 가족을 지옥으로 끌고 간 최현수에 대한 원망은 없고, 최현수와 오영제의 악행에 휘말린 강은주에 대한 애도도 없다. 최서원에게 오세령의 존재 또한 성인이 되자 말끔히 사라진다. 피해자는 모두 지워지고 서원이 오영제에게 복수할 수 있는 수단-문하영의 거취-으로만 존재한다.
✒ 보니 가머스 📔 그 옛날 1961년은 여자들이 오후마다 셔츠웨이스트 원피스 차림으로 이웃집 정원에 모여 수다를 떨던 때였다. - 5 - 엘리자베스 조트, 캘빈 에번스, 여섯시-삼십분, 매드 조트, 해리엇 슬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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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를 살고 있는 엘리자베스 조트가 '여성의 한계'로 규정된 모든 벽을 부수고 자신의 성취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의 주체적인 삶 응원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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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풀 때 언제나 간단한 해결책을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걸 믿는 편이 훨씬 쉽거든. 실제로 보이고 만져지고 설명할 수 있는 걸 믿기는 오히려 어려워. 말하자면 실재하는 자기 자신을 믿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캘빈 —” “최소한 반지라도 봐줘. 나 이거 몇 달 동안 들고 다녔어. 제발 부탁이야.” 그는 애원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싫어. 그러면 거절하기 더 어려워지잖아.”
“왜냐니, 여자가 조정을 어떻게 한다는 거야.” 이 말을 뱉자마자 엘리자베스는 후회하고 말았다. 캘빈은 깜짝 놀라 물었다. “엘리자베스 조트, 지금 너 여자는 조정 못 한다고 말했어?” 그 말 때문에 앞날은 정해져버렸다.
기름을 절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혼자 집까지 운전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바깥에 있는 나무를 들이받으면 안 되니까. 기차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죽은 아버지에게 뭐든 물어볼 수 있다면, 아이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엄마를 처음 봤을 때 무슨 느낌이었어? 첫눈에 사랑에 빠졌어?
“그러면 오늘 6시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해요. 우리 집 실험실에서 모두 함께요. 에이버리와 윌슨, 매드와 여섯시-삼십분, 해리엇, 월터와 어맨다까지 모여서요. 조만간 웨이클리와 메이슨도 만나보셔야 할 거예요. 온 가족을 보셔야죠.”
4 - 박상하 김석일 김수현 김도현 정지원 -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결국 자신의 자식까지 해친다. 그리고 한명의 죽음에는 수 많은 간접적 가해자가 존재한다. 아이의 엄마, 할머니, 학교 선생님까지도. 자기위안과 외면의 결과가 한 아이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가해자와 다름없는 정지원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결국 정지원도 이 소설에서 피해자이기 때문이겠지.
✒ 존 윌리엄스 📔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 4 - 삶을 흔쾌히 감내하는 윌리엄 스토너의 자서전 같은 소설. - 옮긴이의 말 중 "그는 삶을 관조하는 자였다."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 📝 서술형 수학 문제의 경우 답이 틀려도 풀이 과정에서 부분 점수를 받는다. 인생이라는 문제를 푸는 세상의 좋은 소설들도 자신만의 오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부분적 옳음을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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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 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야
그레이스는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의 차분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디스의 작업대에 있는 램프 하나만이 켜져 있어서 지나치게 밝은 빛과 깊은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레이스가 컬럼비아를 떠난 것이 사실은 감옥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음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어쩌면 임신도 그런 시도일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상냥함과 부드럽고 선한 의지 때문에 그 감옥을 다시 찾고 있었다.
나는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나 내게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 전혀 … 난 자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좋은 교수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 자네는 무식한 개자식일세
✒ 편혜영 📔 오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 4 - 한남 오기, 자신이 판 구덩이에 스스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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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이 얼마 후에 그 남자를 찾아내. 무사히 살고 있어. 다른 도시에서, 이름을 바꾸고 직장을 구해서 살고 있어. 새로 생긴 가족과 함께.” “아내가 싫었나 보네.” “그보다는 뭔가를 알게 된 것 같아.” “뭘?” 아내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했네. 그래서 행복했나?” 갑자기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눈물이 조금 맺히는 정도였는데 이내 소리 내어 울었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장모는 산 것을 보려고 잉어를 키우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잉어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려고 키운다는 게 아닐까.